'프릭션맥싱(Friction-maxxing)'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일부러 불편함을 우리의 삶에 다시 들여놓는다는 뜻으로, 책을 바로 사는 대신에 도서관에서 빌리고, 고장 난 물건을 고쳐 쓰고, 조언이 필요할 때 AI에게 묻는 대신에 선배에게 전화를 거는 식의 행동 패턴을 이야기합니다.

올해 1월 The Cut의 칼럼니스트 Kathryn Jezer-Morton이 쓴 에세이에서 처음 나온 말이라고 해요. 이 말을 틱톡에서 Z세대 크리에이터가 챌린지로 받아서 퍼졌고, 이후 두 달 사이에 FT, Guardian, Forbes, Wired에서까지 프릭션맥싱 현상에 대해서 다룰 만큼 바이럴이 되기도 했었습니다. ‘프릭션맥싱’이라는 흐름을 시장의 기회로 읽는 시각도 있어서, ‘편리함 때문에 사라진 수고를 사용자가 다시 해 보게 하는 제품’이 다음 소비자 시장을 열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품을 만드는 쪽에서 보면, 프릭션맥싱은 '불편함을 파는 새 제품을 만들라'는 주문이라기보다, '지금 만드는 제품이 편리함을 좇다가 무엇까지 없애버렸는가'를 되묻는 신호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사용자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대신해 주는 에이전트를 만든다면, 이 물음은 더 피하기 어렵습니다.

이 ‘마찰’을, 에이전트 제품에는 어디에, 그리고 어떻게 남겨야 할까요?

오늘은, 우리 사람이 이 ‘마찰’ 속에서 무엇을 되찾으려고 하는 것일지에 대한 생각에서 출발해서, 에이전트 제품에 남길 수 있는 - 남겨야 할 - ‘마찰’, 그리고 그걸 고르는 기준까지 한 번 짚어 보려고 합니다.

에이전트 제품에는 마찰을 어디에, 어떻게 남겨야 할까요?

오늘 이 글에서는, 프릭션맥싱을 제품 설계의 신호로 읽고 이 질문에 답해 보려고 합니다.

‘마찰’ 속에서 우리가 되찾으려는 것

Jezer-Morton은, 프릭션맥싱이 단순히 화면 보는 시간을 줄이자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가 말하는 ‘불편’은, 대개 진짜 불편이라기보다 ‘남들과 부대끼면서 살다 보면 생기는,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 (the vagaries of being a person living with other people)’에 가깝습니다. 줄을 서서 기다리고, 상대의 답을 기다리고, 약속이 틀어지는 일 같은 것들이죠. 프릭션맥싱은 그런 일들을 견디는 힘을 기르다가, 나중에는 즐기기까지 하는 과정이라는 건데요. 온라인에서 돌고 있는 ‘프릭션맥싱’의 실천 목록을 봐도, 도서관에서 책 빌리기, 손으로 장보기 목록 쓰기, 글 고쳐 쓰기, 집에서 친구 대접하기, 앨범을 처음부터 끝까지 듣기 등처럼, 기술을 버리는 일이라기보다는 ‘일상의 속도와 순서를 되돌리는 일’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제품’을 만드는 입장에서 한 번 이 현상을 본다면, 이건 어쩌면 꽤 아픈 신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사용자가 편리한 제품을 두고 굳이 일부러 불편한 방법을 찾아 나선다는 건, 우리가 마찰을 없애면서 사용자가 아끼던 무언가까지 함께 덜어냈다는 뜻일 수가 있으니까요.

생각해 보면, 이 ‘마찰’ 속에는 여러 가지가 묶여 있었습니다.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잠시 멈춰서 멍을 때리면서 쉬기도 하고, 서툴게 뭔가를 직접 해 보면서 실력을 쌓기도 하고, 길을 묻고 부탁하면서 관계를 맺기도 해요. 내가 직접 고르고 조립한 물건에는 정이 더 가고, 평소와 다른 돌아가는 길에서는 뜻밖의 발견을 하기도 하고, 여러 선택지를 견줘 보면서 ‘이게 맞나’를 따져 보고 스스로 판단하기도 하죠.

그런데 지난 20년 동안의 UX는 이 묶음을 ‘단계 수’나 ‘이탈률’ 같은 하나의 비용으로만 보고 덜어 왔고, 그 과정에서 - 비용만이 아니라 - 그 안에 묶여 있던, 무언가 우리에게 의미와 가치가 있던 것까지 통째로 들어낸 경우가 많았던 건가 생각이 듭니다.

마찰 제로의 종착지, 에이전트

AI 에이전트는, 이 ‘마찰 제거’라는 원칙을 거의 끝까지 밀고 가는 걸 가능하게 해 주는 기술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다양한 편의를 제공한 이전의 기술들이 탭 한 번, 클릭 한 번을 줄여 주는 정도였다면, 에이전트는 일정 조율, 초안 작성, 비교나 결제 같은 일을 그 전체 과정 째로 아예 알아서 해 버릴 수 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앞에서 이야기한 ‘마찰의 묶음’도 한꺼번에 사라집니다. 일정을 맞추려고 몇 번씩 메시지를 주고받으면서 쌓이는 관계, 초안을 직접 쓰면서 조금씩 가다듬어지는 생각, 이 상품 저 상품을 견줘 보면서 생기는 판단이라든가 나름의 애착 같은 것들이 함께 없어지는 거죠.

게다가, 에이전트가 치워버린 ‘마찰’이 그냥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다른 위치로 그저 자리를 옮길 뿐인 경우도 있거든요. 스탠퍼드의 Bob Sutton 교수는, AI가 길어진 메일이나 슬랙 메시지의 모습으로 마찰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긴다고 지적하면서 - 이게 결국 AI Slop이죠 - ‘잘못 쓰인 AI는 멍청한 일을 더 빨리 하게 해 줄 뿐(When used in the wrong ways, AI just enables people to do dumb things faster)’이라고 덧붙입니다. 내가 덜어낸 수고가, 받는 사람이 긴 글을 읽어 내는 수고나 나중에 누군가 실수를 바로잡는 수고로 모양만 바꾼 셈이라는 거예요.

물론, ‘마찰을 되살리자’는 이야기가 단순한 향수로 흐를 위험도 분명히 있습니다. 아래 그림을 보면, ‘다시 들여오는 마찰’의 자리에 CD 플레이어와 아이팟이 놓여 있는데요. 따지고 보면 이것들도 한때는 LP의 불편을 없애 준 ‘편의를 제공하는 기술’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일부러 고르는 ‘불편’이, 실은 어제의 ‘편의’였던 것이죠. Guardian이 프릭션맥싱을 두고 옛날의 ‘인격 수양(character-building)’을 새로 포장한 말이라고 꼬집은 것도, 그런 맥락입니다.

그렇다면, 에이전트를 설계하는 쪽에서 할 일은, 예전의 불편을 그대로 되살리는 게 아니라 ‘마찰 속에 묶여 있던 여러 가지’ 가운데 ‘무엇을 남길지’를 골라내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에이전트 제품에 남겨야 할 ‘마찰’은 어떤 것일까

그렇다면 실제 에이전트 제품은 어떨까요?

이미 나와 있는 제품들을 하나씩 살펴보면, 마찰을 남기는 방식도 앞에서 이야기한 ‘마찰의 묶음’만큼이나 여러 갈래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가장 앞서 있는 건 ‘학습’을 남기는 마찰입니다. Anthropic의 Claude Learning Mode, OpenAI의 ChatGPT Study Mode, Google의 Gemini Guided Learning은 모두, 답을 바로 알려 주는 대신에 질문과 힌트를 주면서 사용자가 문제를 직접 풀어 가게 합니다. Claude Code의 Learning 스타일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서, 작업 중간중간에 #TODO를 남겨 두고 핵심 코드는 사용자가 직접 채우게 하죠. 흥미로운 건, 이런 기능들이 별도의 제품으로 나온 게 아니라 이미 쓰고 있는 제품 안에 ‘모드’ 하나로 들어와 있다는 점입니다. 마찰을 파는 새 제품을 만든 게 아니라, 있던 제품에 마찰을 고를 수 있는 스위치를 단 셈이라고 할 수 있겠죠.

‘결제’처럼 한 번 하면 되돌리기 어려운 일에서는, ‘판단’과 ‘신뢰’를 남기는 마찰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Amex가 10월에 내놓은 Intent Intelligence Framework를 보면, 에이전트가 가맹점, 최대 예산, 원하는 상품 조건 같은 구매 지시를 먼저 받아 적고, 사용자가 본인 인증을 거쳐서 그 지시를 승인해야만 결제에 쓸 디지털 자격증명을 내줍니다. 그리고 사용자들도 이런 마찰을 원하는 것 같습니다. ACI Worldwide가 미국과 영국 소비자 3,300여 명에게 물어본 설문에서, 승인 없이 AI가 알아서 사 주는 걸 받아들이겠다는 패션 소비자는 고작 7%에 불과했거든요.

‘관계’를 남기는 마찰은, 아직은 제품에 구현된 구체화된 무엇이라기보다는 ‘원칙’에 가깝습니다. Sutton 교수는, AI가 응대를 맡는 서비스라도 사용자가 실제 사람과 연결되기까지 클릭이 두세 번을 넘어가면 ‘사람을 너무 깊숙이 숨겨 둔 것(you’ve probably buried the human too deep)’이라고 말합니다. 에이전트가 많은 일을 대신해 주더라도, 사람과 사람이 직접 닿는 길만큼은 늘 가까이 열어 둬야 한다는 이야기로 이해해야 할 겁니다. 또, 일정 조율은 맡기더라도, 사과나 감사의 말까지 에이전트가 대신 보내는 게 맞는지는 한 번 생각해 볼 일이죠.

기다림이 만드는 ‘기대’와 ‘애착’은, 사실 에이전트보다 브랜드들이 먼저 써 온 방법입니다. 광고대행사 Uncommon의 David Yates는 예약을 받지 않아서 줄을 서야만 하는 레스토랑 Dishoom, 추첨으로 운동화를 파는 Nike SNKRS, 초대받아야 가입할 수 있었던 Monzo를 예로 들면서, 적당한 수고가 오히려 가치와 기대를 만든다고 말합니다. 내가 직접 조립한 가구에 더 정이 가는 ‘IKEA 효과’도 같은 이야기고요.

‘검증’을 남기는 마찰도 있습니다. MindStudio는 한 모델이 내놓은 첫 답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여러 모델과 사람이 서로의 답을 반박하게 해 보라고 권합니다. 에이전트가 자기 한계를 밝히지 않은 채 오래된 파일을 첨부해 버린 사례를 들면서, ‘매끄럽지만 틀린 답’을 알아보는 감각은 쓰지 않으면 약해진다고 경고를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판단’은 에이전트 제품이 남길 수 있는 마찰 가운데 한 갈래일 뿐입니다. 학습도, 관계도, 애착도, 검증도, 저마다 어디에 둘지 자리를 정해서 설계해야 하는 대상이에요.

다섯 갈래를 한 장으로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남겨야 할 마찰을 고르는 기준

그렇다고 모든 마찰을 다시 그대로 들여놓자는 이야기는, 당연히 아닙니다.

Sutton 교수도 ‘모든 게 너무 어렵고 느린 세상은, 모든 게 너무 쉽고 빠른 세상보다 더 나쁠 수 있다(A world where everything is too hard and slow may be even worse than a world where everything is too easy and fast)’고 하니까요. 결국 중요한 건, 어떤 마찰은 없애고 어떤 마찰은 남길지를 가려내는 일이겠죠.

이 기준에 대해서는, 사실 Sutton과 Yates가 이미 꽤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왔습니다. Sutton은 실수의 대가가 크거나 되돌릴 수 없는 곳, 그리고 신뢰를 쌓아야 하는 곳에서는 일부러 속도를 늦추라고 합니다. 좋은 리더는 ‘옳은 일은 쉽게, 그른 일은 어렵게(make the right things easier and the wrong things harder)’ 만든다는 겁니다.

Yates가 제시하는 순서는 조금 더 실무적입니다. 먼저 쓸데없는 수고, 그러니까 ‘나쁜 마찰(negative friction)’부터 없애고, 그래도 남기고 싶은 마찰이 있다면 세 가지를 물어보라고 합니다. 그 수고가 사용자가 돌려받는 가치에 견줘봤을 때 공정한가, 사업에도 도움이 되는가, 그리고 우리 브랜드만 할 수 있는 일인가.

그런데 에이전트 제품이라면, 여기에 몇 가지 질문을 더 붙여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마찰을 기본값으로 둘지, 아니면 사용자가 켜고 끄는 선택지로 둘지입니다. ChatGPT Study Mode는 같은 창에서 클릭 한 번이면 일반 대화로 돌아가는데, 사용자가 끌 수 있는 마찰은 정작 지치고 바쁜 순간에 가장 먼저 꺼지기 마련입니다. 운동 앱 알림을 언제 가장 먼저 꺼 버리는지 떠올려 보면 쉽게 알 수 있죠. 그래서 정말 지켜야 할 마찰이라면, 끌 수 있는 옵션이 아니라 기본값으로 두는 게 맞을 수도 있습니다.

다음으로, 마찰은 전환율과 정면으로 부딪칩니다. Quantum Metric이 5월에 낸 조사를 보면, AI 챗봇을 거쳐서 들어온 고객은 마찰을 딱 한 번만 겪어도 이탈할 가능성이 두 배나 높다고 해요. 그렇다고 승인 단계를 아예 없애 버리면, 이번에는 신뢰가 무너집니다. 마찰을 남긴다는 건 그만큼 사용자를 잃을 위험을 감수한다는 뜻이고, 그래서 어디에 남길지를 더 신중하게 골라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에이전트가 치운 마찰이 결국 누구의 몫이 되는지입니다. 앞에서 본 Sutton의 지적처럼, 사용자의 수고를 줄인 만큼 메시지를 받는 사람이나 서비스를 운영하는 사람의 수고가 늘어난다면, 그건 마찰을 없앴다기보다는 - 다른 누군가에게 - 옮긴 것에 가깝습니다.

결국 에이전트 제품을 설계한다는 건, ‘얼마나 많이 대신해 줄 수 있나’에서 ‘어디서 멈추고, 무엇을 사용자의 몫으로 남길까’로 무게중심을 옮겨 가는 일이라고 봅니다.

맺으며

생각해 보면, 한국 사용자는 이미 ‘마찰 없는 일상’에 꽤 익숙합니다. 밤에 주문한 물건이 아침이면 문 앞에 와 있고, 결제는 지문 한 번이면 끝나니까요.

그런데 정작 ‘프릭션맥싱’이라는 말은 아직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말보다 현상이 먼저 들어온 셈이라고 해야 할지, 패션 플랫폼 지그재그에서 올해 6~8월 유선 이어폰 등록 상품 수가 1년 전보다 223% 늘었다는 한국경제 기사도 있기는 합니다. 줄이 꼬이는 불편이, 오히려 하나의 스타일이 된 거죠.

이렇게 마찰 없는 서비스에 익숙한 사용자가 에이전트를 만나면, 어떻게 될까요?

더 많은 일을 기꺼이 맡기게 될지, 아니면 오히려 더 빨리 ‘뭔가 빠졌다’고 느끼게 될지는,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해 보입니다. 다음 세대를 위한 경쟁에서 이기는 에이전트 제품은, 가장 매끄러운 제품이라기보다 ‘마찰’을 가장 잘 배치한 제품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입니다. 무엇이든 대신해 주는 능력은 머지않아 서로 비슷해지겠지만, 어디서 멈추고 무엇을 사용자의 몫으로 남길지 - 그 판단만큼은 제품마다 다를 테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프릭션맥싱은 사용자가, 소비자가, 그 ‘배치’를 우리보다 먼저, 스스로 하기 시작했다는 신호로 읽어야 할 것 같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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